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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selling Stories/Anger

화풀기

by Sangdam 2020. 5. 31.

이재준님이 쓴 <절대 긍정으로 산다>에서 소개된 <에스키모의 막대>는 화와 분노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에스키모의 막대:
에스키모인들이
분노를 다루는 방법

에스키모는 분노가 밀려올 때면
무작정 걷는다.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그 때 되돌아선다.

그들은 되돌아설 때
바로 그 지점에 막대를 꽂아 둔다.

살다가 또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고 걷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꽂아 둔 막대를
발견한다면

요즘 사는게
더 어려워졌다는 뜻이고,

그 막대를 볼 수 없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는 뜻이 된다.

내 안의 나와
끝없는 얘기를 나누며

평화로움이 찾아올 때까지
가 보라.

그리고 그 곳에 막대를 꽂고
돌아오라.

슬픔과 분노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막대를 꽂는 사람은 행복하다.

위로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도와주는

또 다른 내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참고 용서하는 것이
인격의 힘이다.

사람다움이란
자제력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화를 이야기하자면서 에스키모가 분노를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에 의하면 화병은 울화병의 준말로 화의 기운을 가진 분노가 쌓여 울(鬱)해진(답답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불과 같은 양태로 폭발하는 질환을 일컫는다. 따라서 한국인의 정서로 화는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마음 안에 쌓이고 쌓인 분노가 불과 같이 올라오는 것이 화이기 때문이다. 결국 화란 분노가 표현되어진 형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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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분노의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표현하는 분노의 대상이 나를 화나게 한 그 사건이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그 내면을 살펴보면 화와 분노의 대상은 실은 그것이나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인 것을 우리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노는 결국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서운함,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 혹은 이해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 속상함, 슬픔, 좌절감, 창피함,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 자신의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자신의 기대나 바람 혹은 예상이 빗나가거나 갑자기 이런 것들이 일어난 것에 대한 당혹감 등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결국 이것들은 다른 사람 혹은 나와 마주하고 있는 대상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내 안에 있는 것들이고, 내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며 따라서 화와 분노란 이런 나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나의 화이고 나의 분노이지 그의 분노나 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살된 아들 녀석이 세상물정 모르고 티비에서 나온 단어를 아빠에게 사용했다고 해보자.

“이 바보야!!!”

아빠는 이를 듣고 화를 내야하나 아니면 웃어넘겨야 하나? 화를 내는 아빠는 아마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화의 감정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면 자신을 잘 관찰하고 살펴볼 일이다. 진짜 바보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정말 바보가 아닌데 이런 감정이 일어난다면 위에 열거한 여러 이유들을 스스로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분노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또 다른 측면은 내 마음 안에 일어난 화의 감정을 다루는 스스로의 자세이다. 화와 분노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불과 같이 밖으로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폭발성이 강하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분노장애란 분노를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 자신이 조정되어져 간다는 것에 문제가 존재한다. 분노의 현상을 보면 분노는 분노를 더 큰 분노로 이끌며 부정의 감정에 더한 부정의 감정을 쏟아 붓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건에 사건을 더하게 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분노의 작용은 따지고 보면 분노를 일으키게 한 상황이나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기초할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변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으니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야기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분노의 대상을 바꾸려 할 때 우리는 더 큰 분노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내가 아니니 내가 원하는데로 그가 변화될 수 있다는 환상은 우리를 더 큰 좌절로 인도한다. 결국 분노가 또 다른 계속되는 분노를 야기하게 되고 이것은 분노에서 온 좌절에 또 다시 분노할 수 뿐이 없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의 고리는 매번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과연 화로 연결된 이러한 고리를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

분노와 마주선 우리는 화를 화로 다스리는 태를 끊기 위해 화를 다스리는 새로운 시도를 터득해야 한다. 화를 대하는 새롭고 지혜로운 우리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난 분노로 위장된 분노의 실체를 파악하여 이해하고, 이를 따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부드러운 가슴으로 감싸고 사랑으로 안아주며 자연스러움 안에서 발산하려는 자세이다. 분노가 분노를 낳는 그 내면의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그래서 분노가 더 이상 분노를 낳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낳도록 하는 것이 분노를 마주하며 가져야할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내 앞에 서있는 분노의 대상을 바꾸려할 때 우리는 더 큰 분노와 마주할 수 있다. 그 분노의 대상을 바라보는 아니, 실은 그 분노 자체인 내 자신을 바꾸는 것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덜 소모시키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분노가 일어나면
무한이 걸어보자!

그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
사람이나 사건이 아닌

분노를 가슴에 뭍고 사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한없이 걸어보자!

그러다 보면
막대를 꽂고 뒤돌아서 돌아올
그 순간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곤 자신에게 이야기해 보자

분노를 내지 않고 잘 다스린 것이
얼마나 현명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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